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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한국의 미술 포스터 설명
Details
Category: 역사문화 수업 자료
09 December 2008
Last Updated: 09 December 2008
Hits: 882

한국의 미술 포스터 설명

*고구려, 벽화

고구려 벽화의 바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주로 초기에 그려진 춤무덤.씨름무덤.세칸무덤과 같이 벽에 회를 발라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경우와, 다섯무덤(오회분) 사신무덤과 같이 잘 다듬은 돌 표면에 직접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들은 모두 후기 벽화에 속한다.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고분벽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마치 현대의 매스컴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기록으로 나타내 주는 신문이라면, 벽화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텔레비전 영상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사의 상당량이 외국 기자들이 피상적으로 쓴 외신을 인용 보도한 것이 많지만, 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제작한 생생한 화면 뉴스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현대미술의 족보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복 받은 민족이다. 우리 선조가 1,500년 전에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남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자부와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외국 학자는 "벽화는 현대미술의 족보입니다. 벽화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민족보다 훨씬 위대하고 강합니다"라고 했다. (이종상 '아!고구려', 조선일보)

     고구려 고분벽화는 현재까지 대략 95기가 발견되었다. 집안지역에는 23기가 있는데, 모두루총, 환문총, 각저총(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회분(다섯무덤)4호묘, 오회분(다섯무덤)5호묘, 만보정1368호분, 장천1호분, 산연화총 등이 이곳에 있다. 또 최초의 수도였던 환인현지역에는 미창구장군묘 1기가 발견되었다. 북한에서는 평양지역에 동명왕릉, 진파리1호분, 내리1호분을 비롯해 24기가 있고, 천왕지신총, 요동성총 등 4기가 순천지역에, 쌍영총, 강서중묘, 강서대묘, 덕흥리고분, 약수리고분 등 21기가 남포지역에 있다. 또 팔청리고분을 비롯한 6기가 대동지역에 있고, 기타 온천지역에 2기, 평원지역에 1기, 평성지역에 1기 등 평양과 평안남도 지역에만 59기가 있다. 또 황해도에는 안악지역을 중심으로 안악3호분, 평정리1호분을 비롯한 12기가 있다.

     이렇듯 고분벽화는 집안지역과 평양, 안악, 남포, 순천, 대동지역 등 고구려의 중심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및 고려에도 고분벽화가 있기는 하지만, 양과 질에서 고구려와 비할 바가 못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혼이 담겨진 위대한 예술작품이며, 그들의 사상과 생활모습이 담겨진 고구려사의 귀중한 연구자료이기도 하다.  http://myhome.naver.com/godaesa/goguryeo/wallpaintframe.htm 중에서


* 백제, 불상

백제인의 미소 '마애삼존불상'

백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았을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 사람들은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각기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과 살아가는 환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사람들의 얼굴은 강인한 인상을 풍깁니다. 고구려의 자연 환경이 춥고 거칠었기 때문이지요. 고분 벽화 등에 나타난 고구려인들은 부리부리한 눈에 이목구비가 뚜렷해 쉽게 얕잡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답니다.
백제는 무덤 벽화 대신 불상이나 다른 나라 사람이 그린 백제 사신의 모습 등을 통해서만 그 생김새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2 개의 무덤에서 벽화가 발견됐지만 인물 대신 백호(흰색 호랑이)를 표현한 사신도와 연꽃 무늬 등만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신라인의 얼굴을 대표하는 것은 ‘신라 천년의 미소’라고 불리는 기와에 나타난 넉넉하게 미소짓는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제인의 미소’로 상징되는 것은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가운데에 보이는 부처님 얼굴이랍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활짝 벌려 웃고 있는 모습이 아주 천진난만해 보이지요.
입가에도 미소를 가득 띠어 쾌활한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좌우에 있는 부처님들도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답니다. 이 모습은 당시 백제 사람들이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삼국사기’에서 백제 임금들의 인상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체로 인자하고 관대하며 너그러운 성격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불상에 나타난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백제 불상에 나타나는 특징은 둥근 얼굴과 적당히 살이 오른 뺨,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은 환한 표정입니다. 보물 제329호인 부여 군수리석조좌상은 소박한 백제인의 얼굴을 보는 듯합니다.
중국의 불상에 보이는 표정들은 웃고는 있지만, 어딘지 딱딱하고 틀에 박힌 인상을 줍니다.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요. 일본 불상은 이국적인 얼굴에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백제 불상에서 보이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간적인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백제인들은 불상 뿐 아니라 돌에 새기거나 흙으로 빚은 얼굴들도 많이 남겼답니다. 웃는 표정 외에도 화가 난 모습, 찡그린 모습 등 다채로운 표정들이 유물에 나타나기도 하지요.
부여 관북리에서 출토된 토기의 표면에는 표정이 비슷한 다섯 사람의 얼굴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상에서 보이는 온화하고 화사한 미소를 띈 얼굴과는 달리 눈은 처져 있고,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지요.
꾹 다문 입술은 시름에 잠긴 듯한 모습입니다. 수염이 나 있고 관리의 모자를 쓴 사람은 장년의 남성을 표현한 듯합니다. 어쩌면 토기를 만든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겠지요.
부여 구아리 유적에서 발견된 흙을 이겨서 만든 인물상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움푹 들어간 눈가의 주름과 전반적인 표정은 뭔가 못마땅한 듯 찌푸려 있지만, 벌린 입과 위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이런 유물들은 678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다양한 삶을 살았던 백제인의 모습들을 엿보고 그들의 삶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한답니다.  (http://blog.empas.com/jys0318/22748662 중에서)


*고려, 금관


  금관은 죽은 자의 것이었다  
1973년, 경주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에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1500년 동안 땅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유물들 속에서 신라 황금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금관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발굴될 당시 금관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고깔모양의 금관이 얼굴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1. 황금의 나라, 신라

1921년 경주의 노서동 신라고분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무덤은 황금의 지하 궁전이었다. 비취옥돌과 금장식을 단 화려한 금관뿐 아니라 황금팔찌, 금귀걸이, 말에 쓰이는 마구장식까지도 황금으로 치장을 했다.


2. 금관의 무게

금관의 무게를 따져보면 1Kg이 넘는다. 평상시에 이런 금관을 쓰고 다닐 수 있었을까. 또 허리띠는 무게가 4Kg에 이른다. 금동신발도 평소 신고 다니기에는 굉장히 크다.


3. 금관의 주인

귀한 금관과 함께 무덤에 묻힌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두개골과 치아를 이용해 성별과 나이를 추정할 수 있었다. 또 허리띠의 글자에서 그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4. 금관의 의미

금관의 관 테두리 위로 솟아있는 장식은 사슴 뿔을, 가운데의 세움 장식은 나뭇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비취 옥과 금장식은 바로 나무열매와 나뭇잎이다. 신라금관의 이런 장식은 무엇을 상징하려고 한 것인가.
금관의 장식품은 무엇을 뜻할까요?  

신라의 금관들은 대개 크고 작은 나무와 새, 사슴뿔, 달개장식과 곱은옥 등 각종 장식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요. 우리는 이 장식물에서 아름다움과 당시 왕들의 힘과 재산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바램을 엿볼 수 있어요. 신라 금관의 기본 모양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라인들이 타고 다니며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서는 마을을 지키는 나무(당산목)를 정해두고 보호하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금관에 장식된 ‘새’는 금관의 주인공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 주로 지도자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곡옥’은 비취색의 영롱한 빛을 띄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라 왕족의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장식품이라고 추측됩니다. 이처럼 신라의 금관은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답고 신라인들의 뛰어난 금세공 기술(금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고 꾸미는 기술)을 엿볼 수 있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죠. 또한 금관의 화려한 장식물들을 통해 신라인들의 생각과 생활 모습 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므로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신라의 금세공 기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거기에 달려 있는 장식품(국보 제88호), 금제 교구(금으로 만든 허리띠고리, 국보 제89호), 금 귀걸이, 금제 뒤꽂이, 금제 관식 등이 있습니다.

(http://www.cha.go.kr/kids/school/21.jsp)


* 고려, 청자


고려청자의 아름다운은 흔히 형태. 색, 문양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얘기되곤 한다. 먼저 매병에서와 같이 흐르는 듯한 선의 유려함, 비취옥과 같은 비색, 그리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문양이 그것이다. 고려청자는 당시 고려인은 물론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아름다운 녹색 자기는 열에서 하나를 얻을 만큼 어려우며 이는 하늘의 조화를 빌린 것”이라 하였다. 또한 북송시대의 유명한 학자 태평노인은 중국 정요 백자와 고려의 비색청자를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중국 청자의 황금기를 누렸던 북송시대에 고려청자를 최고로 여겼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http://kr.blog.yahoo.com/reportshop/1111)

고려청자의 특징
고려청자는 도자기기술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는 신비의 색깔과 선의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하고 세련된 문양의 조화로 그 예술적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어느 정도 우리 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반화된 상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표현해 보라고 하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또 청자색에 대하여 감상적 표현을 말하라고 하면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렵다. 청자란 글자가 지닌 뜻으로 풀이해 보면 푸른 빛깔의 자기그릇이다. 그런데 청자에서의 청색이라는 색의 정의가 막연하다. 자연과 도공의 혼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청자의 색을 어떤 사람은 푸른 하늘의 색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먼 산의 푸르름에 비유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깊은 물의 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소 청자를 잘 몰랐던 사람들도 청자를 곁에서 보면 무언가 신비스러움에 도취되고, 그윽한 색깔과 청아함, 섬세하고 다양한 무늬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어쩌면 이런 것이 청자가 지니고 있는 신비함이요, 아름다움이요, 가치일지도 모른다. 청자문화의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중국에서까지 자기 나라의 청자를 제쳐두고 고려청자를 천하에서 제일 귀하고 값진 것 중의 하나로 지목한 바 있어 고려청자의 예술적 가치를 가름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천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 까지도 그 신비스런 아름다움과 예술적 감각을 공감하게 하는 고려청자는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품이며 한국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단군 숭배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 노장, 풍수도참 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였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에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 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이행은 인류 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 도자기 가운데에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었다.
고려청자에는 자연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넘치는 회화적인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구리의 붉은색을 세계최초로 개발하였으며 이를 한두 점 악센트로 사용하는 이외에는 모두 담담하게 표현하는 점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http://kr.blog.yahoo.com/reportshop/995)


*고려, 월정사 8각 9층 석탑

(고려시대, 11∼12세기)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국보 48호로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 있는 월정사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자장율사가 만든것으로 높이는 15.2m이다.

월정사 8각 9층 석탑의 모양(형태)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 탑신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이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각부에 균형을 얻고, 조법도 온화하여 고려의 다층석탑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하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고려, 팔만대장경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일명 고려대장경판)은 지금부터 750여년전인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38년인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만 여장의 목판이다. 몽골의 병란을 맞아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국민이 일치단결 하여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장장 16년의 대장정을 거쳐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다.  

경판의 재질은 지금까지 모두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산벗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 경판은 위의 사진과 같이 앞뒤로 글자가 새겨진 부분과 마구리로 구성되고 총 길이는 68 혹은 78㎝이며 폭은 약 24㎝, 두께는 2.7-3.3㎝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정도이다. 경판은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자, 전후 양면에 644자를 새겼다. 판의 후면 끝에는 경의 이름과 장 수, 천자문 차례의 함호를 새기고 좌우끝의 각목에도 동일한 표시를 남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판은 81,258판 1511부 6802권으로 현재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에서 숨쉬고 있다.  (http://bh.kyungpook.ac.kr/~sjpark/tripi.htm)

해인사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고종 38년인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완성된 뒤 750여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많은 시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스란히 우리 앞에 그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정교한 과학성과 뛰어난 서풍(書風), 방대한 경전의 집대성, 거의 오류가 없는 교정의 치밀함, 수백 년 동안 완벽하게 보존되어온 역사 등을 미루어 볼 때, 해인사팔만대장경은 무아의 경지에서 이루어낸 호국.호법 신앙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각판예술의 극치이다.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J&qnum=5194154)


*조선시대 백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자기는 주지하다시피 분청사기와 백자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14세기경부터 그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제작되어, 서민들의 소탈한 정서나 관청용의 정형화된 형식을 담아냈던 도자기다. 이러한 분청사기에 비해 백자는 실용성을 강조하거나 단정한 양식, 혹은 풍만한 양감을 지닌 조형 등으로 특징지워진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백자는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으나 여말 선초 중국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에서 만든 단단한 백자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해서 제작되고 애용되던 자기이다. 조선 백자에는 순백(純白)에 대한 조선인의 미감(美感)을 철저히 반영되어 있다. 최상품 백자는 하얀 태토에 파르스름한 투명유가 입혀지고, 세종연간(1418-1450)부터는 왕실에서 어기(御器)로 전용했을 뿐 아니라 중국 황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매우 정교한 수준에 이르렀다. 세조연간(1455-1468)에 이르면 서민이라도 부유한 계층은 화려한 백자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반 서민들도 백자를 널리 사용하였다.
백자는 1467년 4월 이후 분원 관요(分院 官窯)시대에 들어서면서 대량생산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분청사기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1592년에 발발한 임난(壬亂)으로 한국도자사에는 100년 이상의 백자 침체기가 있게 된다. 백자의 제작이 활발히 재개된 때는 숙종연간에 들어서면서이고 이러한 양상은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 서울 숭례문 (남대문)


우선 1호, 2호하는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한다. 그러나 동대문은 보물로 지정되고 남대문이 국보로 지정된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출입문으로 대문(大門) 4개와 소문(小門) 4개가 세워졌다.

대문으로 동쪽은 흥인지문(興人之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청문(肅淸門)을 두었으며, 소문으로는 동북쪽에 혜화문(惠化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수구문(水口門),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을 두었다.

이러한 많은 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대문과 남대문뿐이다.

특히 남대문은 1395년에 세워졌고, 동대문은 1396년에 완성되어 남대문이 동대문보다 1년 먼저 앞섰다.

또 한양을 둘러싼 동·서·남·북 대문 가운데에서도 남대문은 정문(正門)으로서 동대문보다 그 중요성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더 높았다.

또한 건축 기술면에서도 남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동대문보다 크다고 한다.

일명 숭례문이라고도 불리운 남대문. 일제가 우리 문화를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단순히 방향을 지칭하는 뜻의 남대문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에 남대문이 우리나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의 여론까지 대두된 적이 있다.

어쨌든 남대문이 문화재 가운데 가장 가치가 크다고 인정하여 제1호로 지정한 것은 아니다.

남대문은 1396년(태조5)에 축조되어 1398년 2월에 준공되었으며 그 뒤 1447년(세종 29)에 개수공사가 있었고 1961년부터 1962년 사이에 실시된 해체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479년에도 대대적인 중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다포양식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한국건축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 숭례문이라고 쓴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문의 편액이 가로 쓰임인데 반해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은 숭례의 두 글자가 불꽃(炎)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산(火山)에 대하여 화기를 누르기 위한 것이라 한다. (http://kr.blog.yahoo.com/guanghuankr/2241)

* 이중섭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의 한 부농에서 태어나 민족 의식이 강한 오산학교를 다녔는데, 그 곳에서 여러 선생님을 만나 민족의식을 깨닫게 되고,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임용련 선생님은 미술 교사로서 이중섭의 예술적 기초를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중섭은 예술에서 창의성과 역사성을 중시하여 소나 한글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그림을 통해 조국의 비운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IAM&qnum=5560830

불같은 예술혼을 사르다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을 기리는 문화예술축제. 이중섭 화가는 전통의 아름다움과 현대적 감각이 잘 조화된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한국근대미술의 여명기를 연 인물로서 암울한 시대와 불우한 환경, 비극적 삶 속에서도 한국미술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머무르면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중섭 거주지를 중심으로 해마다 9, 10월이면 그의 사망주기를 맞아 이중섭 화가의 예술혼을 기리는 예술제가 열리고 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백남준은 새로운 방법으로 예술을 해석하여 새로운 사고를 창출해냈으며 단순하고도 기발한 이미지를 생산, 궁극적으로 문화에 다양성을 제공했다. 시인이며 작곡가, 피아니스트, 화가, 비디오 아티스트, 철학자인 백남준-현재 뉴욕의 멀서가에 살며 연중 1/3은 독일등 유럽에서 거주하며 작업한다. 그는 그 자신이 텔레비전 화면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텔레비전을 표현매체로 하여 그것을 기술적으로 제작하고 조립하는 제작자의 위치에서 감상자에게 보다 다양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텔레비전을 물감을 쓰듯이 풍부하게 일개인인 소유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현실에서 보면, 이러한 것은 일부 전위 예술가들의 전유물인 것 같이 보이지만 ,한 폭의 명화를 오래두고 감상하기보다 전자오락실에 드나들기를 즐겨하는 요즈음 젊은 세대들에겐 백남준의 작품이 보다 아름다운 환상적인 화면을 제공해 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시대의 상품은 예술과 정보가 주역이 되는 체험, 필링, 엑스터시,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는 오락물로, 모두 체험 중심의 비제품적 상품들이다. 예술은 그 시대의 중심이 될 것이며, 그의 예술은 그것을 예감하고 만들어지는 미래의 예술형태이다. 그렇듯 백남준, 그의 멀티미디어 하이테크 아트의 가능성은 끝없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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